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무하마드 알리 (문단 편집) == [[미국 흑인 민권 운동|사회운동가]]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www.inflexwetrust.com/Malcolm-X-101.jpg|width=100%]]}}} || || {{{#000000,#ffffff '''네이션 오브 이슬람에서 함께 활동했던 [[말콤 엑스]]와 함께. 여자아이들은 모두 말콤 엑스의 딸들이다.'''}}} || 알리는 권투선수로서도 엄청난 업적을 이뤘지만, 사회 운동가로서 남긴 영향력 또한 상당하다. [[사담 후세인]]을 직접 만나서 설득해 인질로 붙잡힌 미국인 15명을 석방할 수 있도록 했고, 베트남 전쟁 징병 거부를 통해 미국 사회의 인식에 계몽을 가져왔으며, [[흑인민권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또한 자살하려는 사람을 설득해서 구해내기도 했다. 알리는 강경주의의 흑인 인권 운동가였으며, [[인종차별]]과 [[인권]][[침해]]를 일삼는 백인들과 사회적으로 분리되기를 주장하는, '흑인민족주의에 기반한 흑백분리주의자'였다.[* 훗날 알리도 점차 온건한 스탠스로 변화해 갔다. 사회적인 차별과 불공정함에 비판의 목소리를 내는 점은 한결 같았지만.] 이런 강경한 사회적 노선과 알리 본인의 굳센 자존심 때문에 복싱계에서나, 사회적으로나, 심지어 같은 흑인 복서들과도 크고 작은 마찰이 자주 생겼다. 1965년 소니 리스턴과의 2차전에서 1라운드 KO로 승리한 이후, 같은 해 헤비급 챔피언 출신인 플로이드 패터슨이 '알리로부터 챔피언 벨트를 되찾아 미국에 바치는 것이 내 의무다'라며 알리를 비난했다. 심지어 알리를 두고 알리가 개명하기 전 이름인 '캐시어스 클레이'라고 부르며 거세게 비난했다. 결국 이에 화가 난 알리는 "패터슨을 줘패겠다"라고 호언했다. 당시 이슬람 신자, 흑백분리주의자, 강경파였던 알리와 반대로 패터슨은 기독교 신자, 흑백통합주의자, 온건파였다. 그리고 결국 두 선수 간의 매치가 성사됐고, 결과는 알리의 TKO승리였다. 하지만 당시 미국 주류 언론들은 온건파이자 기독교 신자인 패터슨을 옹호했고, 강경파에 이슬람신자였던 알리를 '고의적으로 경기를 질질 끈 후 잔인하게 징벌했다'고 비난했다. 몇 년 후 알리는 패터슨과 한 번 더 붙게 되는데 그때도 승자는 알리였다. 흑표당 대변인을 지냈던 엘드리지 클리버는 알리와 패터슨의 이러한 대립을 두고 "이 싸움은 사상적 측면에서 흑인 혁명의 정신적 성취를 반영하는 전환점이 됐다. '독립적인 흑인'이 '굴종적인 흑인'을 징벌하는 상징적인 승리였다."라고 평한다.[* [[http://shindonga.donga.com/3/all/13/110549/2|#]]] 이와 같은 상황은 2년후인 1967년 어니 테럴과의 매치에서도 반복된다. 어니 테럴은 계체량 측정 도중 알리를 '캐시어스 클레이'라는 이름으로 불러 알리를 도발했다. 그리고 이에 따른 알리의 분노는 당연한 것이었다. 알리가 '캐시어스 클레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이슬람 식 이름인 '무하마드 알리'라는 이름으로 살아가게 된 이유가 인종차별에 시달리던 도중 흑인 인권 운동의 중심에 서있던 [[말콤 엑스]]와 그가 속한 '네이선 오브 이슬람'이란 조직을 접하며 흑인 인권 운동과 이슬람에 경도됐기 때문인데, 인종차별이 극심한 그 당시에, 그것도 자신과 같은 흑인에게, 자신이 살아온 삶과 사회가 직접적으로 연관된 현재의 이름을 무시당하고 개명 전의 이름으로 불리는 모욕을 당한 것이다. 그렇게 분노한 알리는 경기 당일, 링 위에서 테럴에게 펀치를 꽂아 넣으며 '''"내 이름이 뭐라고? 어!? 내 이름이 뭐라고!?"(What's my name? huh? what's my name?)'''라고 소리쳤다. 어니 테럴 역시 "캐시어스 클레이"라고 응수했다. (나중엔 “무하마드 알리.. 무하마드 알리”(“Muhammad Ali.. Muhammad Ali”) 라고 떨면서 말하였다.) 경기 내용은 처음부터 끝까지 알리가 테럴을 완전히 압도하여 알리의 만장일치 판정승. 하지만 이슬람 개종 선언과 개명으로 인해 주류 언론에게 미운 털이 단단히 박힌 알리는 패터슨 전에서도 그랬듯 KO 시킬 수 있음에도 경기를 끌고 갔다며 비난 받았다.[* [[https://youtu.be/bu2bW70K6JE|알리와 테럴의 경기]]] 사족으로 테럴은 경기 내내 알리에게 쉴새없이 맞은 탓에 눈 위가 찢어져 피가 줄줄 흘렀고 두 눈을 제대로 뜰 수 없을 정도로 심하게 부어올랐다. [[https://www.altagracianoticias.com/wp-content/uploads/2018/10/terrel-1.jpg|알리와 경기가 끝난 후 테럴의 모습]] 권투 이외에도 1960년대 말부터 불기 시작한 [[흑인민권운동]]에 동참하여 [[미국]] 흑인들의 권익 향상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런 이유로 일부러 1974년 [[조지 포먼]]과의 대결 때는 [[아프리카]] [[콩고민주공화국|콩고]]의 [[킨샤사]]에서 경기를 벌이기도 했다. 끝내 그의 선택이 옳았다는 것이 증명된 현재는 [[야구]]의 [[재키 로빈슨]] 등과 함께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스포츠맨'''으로 불리기도 한다.[* 안타깝게도 두 선수의 또다른 공통점이 있다면 희소질환을 앓았다는 점이다. 로빈슨의 경우 [[1형 당뇨병]]을 앓았다.] 1960년대,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여 징병 거부를 하다가 챔피언 자리를 박탈당하고 무려 3년 5개월 간 경기를 치르지 못했다. 옥살이를 했다는 것은 법정 싸움에 대한 와전. 당시엔 주류 [[미국]] 사회로부터 엄청난 공격을 받았으나, 법정 공판에서 >'''"내가 [[흑인]]이라는 이유로 내 [[미국|조국]]에서도 [[인종차별|자유를 누리지 못하는데]] 남의 자유를 위해서 싸우라고요? 적어도 [[베트콩]]들은 [[흑인]]이라는 이유로 우릴 무시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내가 왜 [[전쟁|지구 반대편의 이름 모를 사람에게 총부리를 겨눠야 합니까?]]"''' 라고 변론하며 무죄를 선고받고 풀려났다. 당시 이미 흑인 사회에서는 당연히 '병역을 통해 의무를 다 하면 우리에게도 권리가 오겠지' 같은 순진한 생각은 더 이상 먹히지 않았다. 이는 1965년 2월 18일 앨라배마 주의 흑인 인권 운동가이자 [[마틴 루터 킹]] 목사에게 경도되어 있던 26살의 젊은이 지미 리 잭슨이 시위 도중 경찰의 폭행으로부터 모친을 보호하려다 총에 맞아 사망한 사건이 발생하였는데, 바로 그 지미 리 잭슨은 육군 참전 용사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알리가 징병 거부를 시작한 1967년은 [[구정 공세]] 이전이었고 당시까지만 해도 주류 백인 사회에서는 병역 거부는 파렴치한 반국가적 행위로 치부되었다. 그러나 이후 미국에서 베트남전 자체에 대한 회의론이 일면서 알리의 징병 거부가 재평가되기 시작한 것이다. 무죄를 선고받긴 했으나 긴 법정싸움 이후 전성기의 나이가 지나 육체적으로 노쇠하였다. 법정싸움 기간 동안 링 위에 서지 못한 그는 주무기였던 경쾌한 스텝을 이용해 반사신경만으로 주먹을 회피하던 노 가드 전술의 비중을 줄이게 되었다. 그가 전성기를 벗어나 경력 중반기에 대결한 선수들은 조 프레이저, 조지 포먼, 어니 세이버스, 켄 너턴, 척 휴프너 등 모두 시대를 초월해 최고로 인정받는 돌주먹들이었다. 하지만 알리는 이른바 'Rope-a-dope' 전술을 고안, 로프의 신축력을 이용해 펀치의 충격을 흡수하는 전술로 이들을 모조리 쓰러뜨린다. 또한 알리는 사회 운동가뿐만이 아닌 [[평화주의]]자이자 [[인문주의]]자였다. 알리는 언젠가 한 인터뷰에서 "세계 헤비급 챔피언의 역할이 무엇이냐"라는 질문에 "신의 발가락"이라고 대답한 적이 있다. "신을 등에 업고 세계의 모든 어두운 곳을 뛰어야 한다"라는 것이 그가 내린 정의의 이유였다. 이러한 업적 덕분에 은퇴 이후 [[미국 대통령 자유 훈장]] 수여[* 자유 훈장과 시민 훈장 두 개를 모두 수여받았다.], 오토 한 평화 메달 수여, UN 평화의 메신저 임명, [[프린스턴 대학교]] 명예 박사학위 수여,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에 입성되는 등 그 공로를 인정받았다. 알리는 때로는 저항자로서 흑인들의 권리가 법대로 실행되지 않는 것에 항의하여 금메달을 강에 던져버렸으며,[* 상술했듯 알리 재단에서는 금메달을 버렸다는 얘기를 부인하고 있다.] 때로는 지식인처럼 부정의한 전쟁을 고발하기 위해 내로라하는 엘리트들 앞에서 미국의 명문대에 강연을 다녔고, 때로는 광대처럼 브로드웨이에서 <백인들의 희망>이라는 연극에 주인공으로 출연해 많은 사람들에게 웃음을 선사했고, 때로는 외교관이 되어 [[사담 후세인]]을 만나 억류되어 있던 인질들을 석방하도록 설득했으며, 정치 지도자처럼 미국의 공립 학교와 병원을 찾아다니며 교육과 의료 체계의 중요성을 일깨우고 다녔고, 또 [[파킨슨병]]을 연구하는 재단을 창립하기도 했다.[*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137889|'어쩌면 무하마드 알리는 천사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